환경

실레마을에서 김유정의 '봄·봄'을 느끼다

眞 善 忍 2009. 4. 28. 19:37

실레마을에서 김유정의 '봄·봄'을 느끼다

등록일: 2009년 04월 26일 15시 49분 11초

 
▲ 작가 김유정이 태어나고 자란 생가를 중심으로 김유정 문학촌이 조성되어 있다. 그곳에도 봄이 왔다. 
ⓒ 조윤덕 기자
"밭가생이로 돌 적마다 야릇한 꽃내가 물컥물컥 코를 찌르고 머리 위에서 벌들은 가끔 붕, 붕, 소리를 친다. 바위틈에서 샘물 소리밖에 안 들리는 산골짜기니까 맑은 하늘의 봄볕은 이불 속같이 따스하고 꼭 꿈꾸는 것 같다. 나는 몸이 나른하고 몸살(병을 아직 모르지만)이 날려구 그러는지 가슴이 울렁울렁하고 이랬다."
-김유정 봄·봄 中에서-

풋풋하고 감칠맛 나는 농촌소설의 작가 김유정. 그의 작품들은 고향의 흙냄새를 아련히 추억하게 한다. 그는 질펀하고 구성진 사투리로 순박한 시골 인심을 그렸고, 평범한 이야기 속에서 소작농의 애환과 소박한 꿈도 담았다. '봄·봄', '솥', '산골나그네', '총각과 맹꽁이'등 그의 소설 작품 속엔 김유정의 고향 춘천시 신동면 실레마을의 이야기가 잔잔하게 그려져 있다. 굵직한 산으로 둘러싸여 아늑한 곳이 마치 떡시루 같다 하여 붙여진 실레마을은 소설속 묘사만큼이나 '봄'스러운 곳이다.

실레마을은 김유정 소설의 배경이 됐고, 실레마을서 만난 사람들은 그 소설의 주인공이 됐다. 실레마을의 '새고개'는 소설 '봄·봄'에서 주인공이 밭을 갈던 화전이다. 점순이가 성례를 시켜달라고 사주를 하고 간 곳이기도 하다. 김유정이 자주 들러 코다리찌개 안주로 술을 먹었던 '주막터'는 소설 '솥'에서 들병이와 근식이가 장래를 약속하던 주막집으로 등장했다. 김유정이 야학을 했던 움막은 소설 '안해'의 주인공이 귀동냥으로 신식 창가와 국문을 배운 곳으로 묘사되기도 했다.

김유정의 소설을 따라 실레마을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김유정의 생가터인 '김유정문학촌' 은 그의 생가와 소설 속 장면을 연상시키는 디딜방아, 외양간, 뒷간, 장독대 등이 조성되어 있다. 김유정의 작품이 소개됐던 신문과 출판된 책, 김유정의 학교 성적표, 자필원고와 그와 관련된 이야기도 전시되어 있어. 실레마을을 두루 살펴보면 '만무방'의 노름터, '봄·봄' 봉필영감의 집, '산골나그네' 덕돌네 주막터, '산골나그네' 물레방아터, '동백꽃'의 산기슭도 만날 수 있다.
 
▲ 문학촌에 세워져 있는 김유정 동상. 
ⓒ 조윤덕 기자
"나는 톨스토이가 되고 싶다"

친구에게 쓴 편지를 마지막으로
스물아홉 짧은 생애를 마감하다

김유정은 1908년 1월 11일 강원도 춘천 실레마을에서 팔남매 중 일곱째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대대로 높은 벼슬도 많이 했던 명망가 출신이었다. 서울 종로구 운니동에서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그가 7세 때 어머니를, 9세 때는 아버지를 잇따라 여의게 된다. 어머니를 일찍 여읜 그는 훗날 그의 여성관과 작품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어려서부터 몸이 허약했던 그는 말더듬이였다. 휘문고보 2학년 때 눌언교정소에서 고치긴 했지만, 그로 인해 그는 말이 별로 없었다. 그는 휘문고보를 거쳐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했지만 결석 때문에 결국 제적처분을 받았다. 그는 당대 명창 박녹주를 짝사랑하게 된다. 2년여 동안 끈질긴 구애에도 불구하고, 그의 마음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는 소설 속에서 사랑에 목마른 애절한 마음을 써내기도 했다.

......어디 사람이 동이 낫다구 거리에서 한번 흘낏 스쳐본, 그나마 잘 낫으면 이어니와, 쭈그렁 밤송이같은 기생에게 정신이 팔린 나도 나렷다. 그럿두 서루 눈이 맞아서 달떳다면야 누가 뭐래랴 마는 저쪽에선 나의 존재를 그리 대단히 너겨주지 않으려는데 나만 몸이 달아서 답장 못받는 엽서를 매일같이 석달동안 썼다.......
-소설 '두꺼비' 중에서-

박녹주와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자, 김유정은 실의에 빠져 고향인 춘천 실레마을로 돌아오게 된다. 이곳에서 그는 마음의 안정을 되찾고, 야학운동을 시작한다. 그는 조카 김영수와 함께 움막을 지어 야학당을 운영했다. 움막에 불이 났을 때 김유정이 야학 아이들을 구해낸 일화도 유명하다. 김유정은 그 후 마을청년들과 금병산과 생가 앞 미루나무를 베어 손수 학교를 만들었다. 그는 간이학교 인가를 받아 '금병의숙'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농촌운동을 벌였다.
 
▲ 밤낮 일만 하다 말텐가? 
들밥을 내오던 점순이가 주인공에게 '밤낮 일만 하다 말텐가?"하며 성례(결혼)는 안 할거냐고 되딸지게 쏘아붙인 장면을 닥종이로 재밌게 표현했다.ⓒ 조윤덕 기자
1933년 당시 25세였던 김유정은 다시 서울로 올라가 고향의 이야기를 소설로 쓰기 시작했다. 그 해 친구 안회남의 주선으로 잡지 <제일선>에 '산골나그네'와 <신여성>에 '총각과 맹꽁이' 발표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한다. 1935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소낙비’가 당선된 데 이어 조선중앙일보에 ‘노다지’가 가작으로 입선돼 정식으로 등단해 주목을 받았다.

이듬해인 1936년 폐결핵과 치질이 악화되는 등 최악의 상황에 처한다. 하지만, 그는 작품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꾸준히 작품을 창작했던 그는 사망하기 11일 전 친한 친구인 안회남에게 편지를 보낸다. 편지에는 병마와 싸우는 그의 힘겨운 상황이 그려진다. 하지만, 극한 상황에도 그는 다시 일어나서 작품을 계속하고 싶어 했다.

"필승아. 나는 날로 몸이 꺼진다. 이제는 자리에서 일어나기조차 자유롭지가 못하다. 밤에는 불면증으로 하여 괴로운 시간을 원망하고 누워 있다. 그리고 맹열이다. 아무리 생각하여도 딱한 일이다. 이러다가는 안 되겠다. 달리 도리를 차리지 않으면 이 몸을 다시는 일으키기 어렵겠다. 필승아 나는 참말로 일어나고 싶다. 지금 나는 병마와 최후의 담판이다."
-사망하기 11일 전 친구 안회남에게 보내는 편지 中에서-

그는 다섯째 누이 유흥의 집으로 거처를 옮겨 죽는 날까지 펜을 놓지 못했다. 1937년 3월 29일, 김유정은 쓸쓸하고 짧았던 삶을 마감한다. '봄·봄', '안해' '심청', '두꺼비', '동백꽃', '5월의 산골작이', '강원도 여성' 등 30여편의 주옥 같은 작품들을 남기고 김유정은 한국 현대 문학사에 큰 별이 됐다.
 
▲ 김유정 역 
ⓒ 조윤덕 기자
김유정 문학촌이 있는 실레마을에서 5분 정도거리에 '김유정역'이 있다. '김유정역'의 본래 이름은 '신남역'이었다. 경춘선인 강촌역과 남춘천역 사이에 위치했던 간이역이 5년 전 역 이름이 바뀌면서 다시 태어난 것이다. 국내에선 인물이름이 역 이름이 된 최초의 역이라는 수식어가 붙게 됐고, 김유정은 실레마을의 대표 아이콘이 됐다.

조윤덕 기자
http://www.epochtimes.co.kr/news/article.html?no=13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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