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련이야기

저명한 예술가이자 호주 시민인 장추이잉(章翠英) 여사는 파룬궁을 수련한다는 이유로 중국감옥에서 8개월 동안 갇혀 박해를 받았다

眞 善 忍 2008. 3. 13. 01:28

저명한 예술가이자 호주 시민인 장추이잉(章翠英) 여사는 파룬궁을 수련한다는 이유로 중국감옥에서 8개월 동안 갇혀 박해를 받았다.   
2000. 12 .2

 

3년 전 저는 심한 관절염으로 고생했습니다. 거의 온몸의 관절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아팠으며 통증으로 거의 침대에 누워서 지냈습니다. 저는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하며 하루하루 연명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삶에 대한 자신감을 잃었을 때 파룬궁은 저의 건강을 차차 회복시켜주었고 삶을 지속할 희망을 주었습니다.

 

1999년 7월, 중국정부는 파룬궁에 대한 탄압을 시작했습니다. 저는 박해받고 고문받아 사망한 동료 파룬궁 수련생들의 소식을 들었습니다. 저는 이 불공평함과 인권침해에 수수방관하고 있을 수 없었습니다. 시드니의 중국영사관이 제 청원서들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저는 중국에 가서 청원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1999년 12월 31일, 저는 천안문 광장에서 국기게양식을 보고 있었는데 경찰 3명이 나를 아무 이유없이 저를 경찰차에 밀어 넣더니 온 얼굴에서 피가 날 정도로 심하게 구타했습니다.

 

2000년 1월 26일, 저는 베이징 런딩(人定) 호수공원에서 파룬궁 연공(煉功)을 했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감옥에 수감되었습니다. 경찰들은 그들이 지칠 때까지 저를 구타했습니다. 제가 "공원에서 운동하는게 금지되어 있다면, 공원은 무슨 용도로 만든 겁니까?"라고 묻자 그들은 대답을 하지 못했습니다.

 

2000년 2월 4일, 남편과 저는 베이징의 한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있었는데 갑자기 10명 이상의 사복경찰들이 들이닥치더니 이유 없이 우리를 체포했습니다. 그들은 우리를 가장 악질적인 범죄자들을 수감하는 감옥으로 보냈습니다. 우리는 사형수들과 함께 7일 동안 감금되어 있었습니다.

 

이유는 단지 우리가 파룬궁을 수련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감금되어있는 동안 그들은 저를 육체적, 정신적으로 고문했습니다. 그들은 저를 추운 겨울에 얼어있는 시멘트 바닥 위에 서있게 한 채로 돌아가면서 24시간 내내 심문했습니다.

 

그들은 제가 며칠동안이나 잠을 자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네다섯명의 경찰들은 저를 둘러싸고 제가 호주 시민권을 포기하도록 강요했습니다. 그들의 비인간적인 대우에 대하여 저는 단식항의를 했습니다. 구속되기 전 베이징에 있을 때, 저는 친구집에서 머무르고 있었습니다. 경찰은 그 중국인 친구를 찾아내어 외국인들과 접촉한 혐의로 구속하고 3년형을 선고했습니다. 제가 만나고 얘기를 나눴던 또 다른 8명의 수련생들 역시 형을 언도받았습니다.

 

2000년 3월 4일, 저는 중국 중앙정부에 청원서를 제출하려고 했습니다. 경찰들은 제 가방을 뒤져 제가 장쩌민 주석과 주룽지 총리에게 쓴 청원서와 파룬궁 서적 몇권을 발견하고 저를 구타했습니다. 이로 인해 저는 며칠동안 청력을 잃었습니다.

 

경찰들은 저를 군대로 끌고갔으며 10명 이상의 군인들이 저를 둘러싸고 밤늦게까지 심문했습니다. 이후에 저는 선전시 구금소로 보내져서 밤새도록 20시간 넘게 폭행당했습니다. 그들은 어떤 법적 절차 없이 저를 구금한 것이었습니다.

 

저는 처음 며칠동안 여러 번 심문 당했으며 어떤 서류들에 서명을 하도록 강요받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죄가 없기 때문에 서명하기를 거절했고 호주 영사와 만나게 해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열흘 후에도 저는 여전히 호주 영사를 만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저에게 석방 날짜를 알려주지 않았으며 파룬궁 서적을 읽지도 못하게 했습니다. 인권을 훼손하는 이러한 비인간적인 대우에 항의하기 위해 3월 16일부터 저는 단식항의를 시작했습니다.

 

그들의 한달 가까이 되는 지연 공작 후에야 3월 31일 저는 드디어 호주 영사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열흘이 넘는 기간의 단식으로 마르고 허약해진 몸으로 저는 눈물을 흘리며 영사관에게 감옥에서 구타당하고 욕을 들었던 고통을 이야기했습니다. 경찰은 영사관과의 대화를 중단하라고 몇번이나 크게 소리쳤습니다. 영사관은 통역관에게 두려워하지 말고 계속해서 통역하라고 말했습니다.

 

50일 이상 지속된 단식기간 중에 저는 더욱 마르고 뼈만 남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저에게 어떤 동정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넌 죽는다 해도 개만도 못하다"와 같은 지저분한 욕설들을 수없이 퍼부었습니다. 그걸 옆에서 보는 사람조차도 그들의 행동에 참을 수 없어 "정말 화가 나는군!"이라고 말했습니다. 단식항의 기간 동안 저는 허약해진 몸에 기운을 보충하고 목숨을 유지하기 위하여 파룬궁 연공을 했습니다.

 

제 연공은 전혀 다른 사람들을 방해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경찰들은 제가 연공을 하는 것을 볼 때마다 구타하고 욕을 퍼붓고 머리카락을 낚아챘으며 몸에 물을 끼얹고 딱딱한 물체로 때렸습니다. 제 몸은 온통 멍투성이였습니다. 저는 밤에 너무 아파 잠을 잘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연공을 못하게 하기 위해 제게 수갑을 채웠습니다. 그들은 연공을 다시 하면 저를 창살에 수갑으로 묶어놓고 죽기만도 못한 삶을 살게 해주겠노라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또한 제 형량을 무겁게 하기 위하여 저를 모함하는 보고서를 쓰기도 했습니다. 감옥 안에는 마음씨가 따뜻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한 박식한 사람은 경찰들의 저에 대한 만행을 참을 수 없어 ‘한 양심적인 중국인’이라는 이름으로 광저우에 있는 호주 영사관에 비밀리에 편지를 보냈고 제 남편에게 전화를 걸어 감옥에서의 저에 대한 박해와 저의 고통을 종식시켜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어떤 수감자들은 경찰들이 그들 자신 뿐 아니라 다른 수감자들에게 저를 때리도록 설득시킬 것이라고 했습니다. 또한 경찰들은 제가 연공하는 것을 못하게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형량을 줄여준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일부 수감자들은 두려움 없이 고압적으로 저를 때리고 욕했습니다.

 

한번은, ‘장’이라고 부르는 수감자가 제가 연공하는 것을 보고 제 몸을 밀었습니다. 그녀는 제 머리를 땅바닥에 쳐박아놓고는 머리를 때렸으며 제 손등을 아주 세게 반복적으로 밟았습니다. 저는 뼈가 부러질 듯이 고통스러웠습니다. 며칠 뒤에 그녀는 저를 난폭하게 때린 ‘돋보이는 행동’으로 석방되었습니다. 그녀는 1000만 위안에 달하는 회사자금을 착복한 혐의로 수감되어 있었습니다. 법에 따르면 그녀는 5년에서 15년의 형을 받았어야 했으나 저로 인해 단지 몇 개월 만에 풀려났습니다.

 

구금소에서 그녀는 맞받아쳐 싸우거나 욕하지 않는 사람들을 협박하고 겁을 줬습니다. 구금 기간 중, 그녀의 행실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고 오히려 악화되었으나 오히려 일찍 풀려났습니다. 도덕이 어디 있습니까? 중국에 법은 어디에 있습니까? 다른 수감자들은 기회가 되면 이 사건을 폭로하라고 말했습니다.

 

수감자들은 감방의 변기를 씻기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매일 변기를 청소했습니다. 겨울에는 누군가 이불이 모자라 추워서 기절할 지경이면, 저는 그녀에게 제 이불을 덮어주고 추위를 대신 감당했습니다. 저는 마음씨 착한 사람들이 파룬궁 수련생들은 착하고 배려가 깊음을 인식할 수 있게 하기 위해 매일 할당된 노동의 두 배로 일을 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저를 동정했고 우리 스승님의 위대함에 감탄했습니다. 몇몇은 저를 혼자 내버려두어야 한다는 규칙을 어겨 벌을 받기도 했습니다. 한 여성은 저와 몇마디를 나누고 제게 몰래 펜을 주었다는 이유만으로 잔인하게 구타 당했습니다.

 

감옥의 생활환경은 매우 나빴습니다. 감방은 어둡고 습하며 혼잡하고 변기까지 있었습니다. 감방 안에 공기가 어떨 지는 상상만으로도 알 수 있었습니다. 구금된지 여러 달 동안 밖에 나가서 햇빛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 혹독한 환경은 제 신체를 지속적으로 망가뜨렸습니다. 머리카락은 한 움큼씩 빠지기도 했고, 온몸은 죄다 피부병에 걸려 가렵고 극도로 고통스러웠습니다. 게다가 저는 50일이 넘는 기간 동안 단식 항의를 했습니다.

 

그 당시 제 몸은 극도로 쇠약해졌습니다. 비참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저를 침대에서 자지 못하게 했고 얼음장 같은 시멘트 바닥 위에서만 자게 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광저우의 호주 영사가 경찰에 항의한 결과 저는 침대에서 잘 수 있게 되었고 두 차례 밖에 나가 걸을 수 있었는데, 이것이 저의 8개월간 감옥생활에서 유일하게 밖에서 했던 활동입니다.

 

감옥에서 저는 장쩌민과 그의 측근들만이 파룬궁 탄압을 원한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들은 국민들이 그들의 생각을 받아들이도록 강요했습니다. 이러한 사악한 힘의 영향으로 일부 사람들은 눈먼 듯이 복종했으나, 대다수는 권력자들에 의한 박해를 지지하고 싶어하지 않아했습니다. 그들은 파룬궁 수련생들을 깊이 동정하고 도와줬습니다.

 

피부병으로 고생할 때 저는 몇몇 감옥 경비들의 보살핌과 도움을 받았습니다. 저는 그들에게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고마움을 글로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동시에 저는 그들에게 감옥에서 중국정부의 의사에게 진찰받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들의 인간성과 저를 그만큼 존중하는 것을 보면 그들은 저를 풀어줄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파룬궁에 대한 박해는 위로부터의 명령이기 때문에 석방은 그들의 능력 밖이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일주일에 7일 내내, 하루에 10시간 이상씩 강제노동을 했습니다. 매일 저는 일을 좀더 하기 위해 일찍 일어나서 늦게 잤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저는 그런 비인간적 대우를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어서 유엔 사무총장인 코피 아난과 호주 영사관에 보내는 서한을 썼습니다.

 

저는 경찰을 비인간적인 심문행위와 불법강제노동으로 고소했습니다. 경찰은 이를 발견한 후 그들은 저에 대한 박해를 더욱 강화했습니다. 그들은 감옥 측에 제게 펜과 종이를 팔지 못하게 했습니다. 제가 더 이상 저의 뜻을 펜으로 표현하지 못하게 되었으므로 저는 제 셔츠 위에 치약으로 글을 썼습니다. 목적은 그들의 양심을 일깨우려는 것이었지만 결과적으로 저는 더 많은 잔인한 대우를 돌려받았습니다.

 

그들은 저를 감방에 거칠게 밀어넣고는 CCTV(감시카메라) 앞에서 내 옷을 거칠게 벗기고는 욕을 했습니다. 저는 그들에게 평화롭게 말했습니다. "당신들은 저를 아무런 이유없이 8개월씩이나 구금했습니다. 제가 말 한마디 할 권리가 없나요? 당신은 뭔가 감출 것이 있기 때문에 제가 글을 쓰지 못하게 하는 것이 아닙니까? 왜 당신들이 저처럼 연약한 여자를 이토록 잔인하게 대하는 거죠?”

 

이로써 그들은 제가 파룬궁을 수련함에 아주 확고함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저를 위협하기 위해 다시 또 저를 남자 감방들 사이에 있는 감방에 가뒀습니다. 저는 감옥에서 고독과 외로움을 느꼈습니다.

 

다른 수감자들은 가족에게 편지를 쓰고 전화를 할 수 있었지만, 저에게는 그것이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하루가 일년 같았습니다. 온가족이 모두 모이는 추석날 밤, 저는 가족들이 몹시 그리웠습니다. 저는 창문의 쇠창살에 기대서 달을 보았습니다. 눈에 눈물이 가득 고였고 저는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쇠창살 사이로 밝은 달을 바라보며, 찢어지는 가슴으로부터 눈물이 흐른다. 가족이 몹시 그립구나. 언제 나는 집에 돌아갈 수 있을까”

 

저는 생각했습니다. ‘진(眞), 선(善), 인(忍)을 믿는 좋은 사람이 이런 비인간적 시련을 겪어야만 하는가? 그들은 저를 거의 5달이나 구금한 후에야 법정에 보내 재판을 받게 했습니다. 광둥성의 중등법원은 저에게 8개월을 판결하였고 저는 항소했습니다. 그들은 파룬궁을 박해한 것으로 인해 역사의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광둥의 고등법원은 판결을 고수하였으며 저에게 판결문에 서명을 하도록 했습니다. 저는 거절하고 저의 무죄를 주장했습니다. 결국 판사는 제 판결문에 ‘나는 무죄이다’라고 썼고 저는 서명을 했습니다. 저는 지장 찍는 것을 거절했는데 저는 제 자신을 범죄자로 생각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2000년 10월 30일, 제가 풀려나기 직전에 호주 영사는 저를 마지막으로 방문해서 다른 요청사항은 없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그에게 제 비행스케쥴과 세부사항을 전달해줄 것을 당부했습니다. 그러나 장쩌민 일당은 그들의 만행이 폭로되고 악행이 드러날 것을 두려워 해서 치사한 수법을 써서 호주 영사관에 잘못된 비행기 번호를 알려주었습니다. 결국, 제 남편은 공항에서 잠도 자지 못한 채 밤새 저를 기다렸으며 제 친구들 또한 공항에서 저를 기약없이 오랜시간 기다렸습니다.

 

제가 풀려날 때, 감옥장은 구두상으로 한 약속을 어기고 파룬궁 서적들을 돌려주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부당하게 제 모든 소지품들을 몰수했습니다. 비행기가 착륙해 제가 호주공항에 들어섰을 때 저를 데리러 왔었던 가족과 친구들은 이미 가버리고 없었습니다. 저는 수중에 돈이 한푼도 없었기 때문에 40센트(미화 20센트)를 빌려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저는 가족과 드디어 상봉했습니다.

 

자유를 찾은 데 대해, 저는 다시 한번 호주 정부, 특히 광저우 호주영사관에 진심어린 감사를 드립니다. 제가 갇혀있는 8달 동안, 그들은 광저우에서 선전시까지 저를 10번 이상 찾아왔습니다. 저는 제가 가장 비참했던 시기에 그들이 준 도움과 끊임없는 노력을 평생토록 잊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감옥에 있는 동안 그들에 대한 진심어린 감사를 표현하기 위하여 호주영사관 직원들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습니다. “당신들의 매번 방문은 제게 고독함의 고통을 잊게 해주었습니다. 당신들의 위로는 한번 또 한번 내가 감옥에서의 쓰라림을 헤쳐나아가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당신들의 변함없는 관심은 내 영혼이 깨어있을 수 있게 하였습니다. 당신들의 끊임없는 노력은 결국 제가 자유를 되찾게 해주었습니다. 진심으로 당신들 모두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저는 제가 겪은 것이 단지 빙산의 일각일 뿐이라는 것을 압니다. 제가 만약 외국 여권을 가지고 있지 않았더라면 저는 더욱 잔혹하게 박해를 받았을 것입니다. 중국 내 수만명의 수련생들은 여전히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며 정의에 호소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정의로운 정부와 선량한 사람들에게 우리를 지속적으로 도와줄 것을 호소합니다. 당신의 서명, 당신의 편지, 혹은 당신이 파룬궁을 돕겠다는 결심은 무엇이든 파룬궁에 대한 장쩌민의 잔인한 박해를 저지시킬 수 있으며, 악이 퍼지는 것을 제지시킬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