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시민 크리스티나 위안의 수련이야기
뉴욕 시민 크리스티나 위안
“중국 공안들과 노동수용소의 교도관들은 저의 어머니에게 저지른 야만적인 악행을 제가 세상에 폭로할까봐 두려워합니다.”
크리스티나 위안은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아메리칸 드림”의 전형이다. 즉, 어린시절은 어려웠지만 자라면서 열심히 노력하여 하버드 대학을 졸업하고 자신의 삶을 충실히 하며 뉴욕에서 성공적인 직업을 가지고 있다.
크리스티나의 어머니 위 벤란 여사는 아직도 중국에서 계속되고 있는 악몽의 전형이다. 즉, 그녀는 모든 권리를 빼앗기고 중국 공안들에 의해 잔혹하게 고문을 받고 재판도 받지 않은채 강제노동수용소로 보내졌다.
크리스티나는 지난 3년 동안 자발적으로 나서서 중국 파룬궁 수련생들에 대한 잔인한 탄압을 종식시키기 위하여 평화적인 청원을 하는 데에 많은 시간을 보냈으며, 지금은 어머니를 악몽으로부터 구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녀는 불법으로 감금된 100명 이상의 파룬궁 수련생들을 구하기 위한 국제적인 노력(international effort)에 참가하고 있으며, 그 수련생들의 가족은 현재 총 16개 국가에서 살고 있다.
어려웠지만 행복했던 어린 시절
크리스티나는 현재 미국 시민이지만 원래는 1970년에 중국 중부지역에서 태어났다. 어린시절 그녀는 한 칸짜리 아파트에서 생활했으며 집 근처 병원의 기술자로 일하던 어머니가 주로 키웠다. 그녀는 “어머니께서 아파트의 희미한 불빛 아래 앉아 오빠와 제 옷을 꿰매어 주시는 동안 우리는 복도에서 놀았어요. 옷을 살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어머니께서는 저희들의 옷을 만들어 주셨지요.”라고 회상한다.
어린시절 크리스티나는 서예, 전통 중국 미술 및 시가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고등학교를 졸업한 그녀는 과학적 재능이 뛰어나 흔히 “중국의 MIT”라고 불리는 중국 명문대학인 칭화대학교 응용물리학과에 진학을 했다.
2년 후에 그녀는 미국으로 건너가 칼-테크 대학교에서 학업을 계속했다. 졸업 후 그녀는 하버드대학에 진학하여 생물물리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모녀가 함께 파룬궁 수련을 시작
하버드 대학에 재학 중이던 1996년 4월 어느 날, 그녀의 급우가 그녀에게 몸과 마음을 수련하는 중국 고대의 일종 기공수련인 파룬궁(法輪功)을 소개해 주었다. 그녀는 매우 흥미로웠다. 그녀는 “저는 파룬궁수련의 간단한 동작과 심오한 원리에 대단한 감명을 받았습니다.”라고 회상했다.
수련을 시작한 직후부터 크리스티나는 예전부터 그녀를 괴롭혔던 몇몇 만성질환으로부터 아주 빨리 벗어났다. 또한 그녀는 직장생활을 더욱 성실하게 했으며 일상생활에서도 스트레스를 예전보다 훨씬 덜 받았다.
크리스티나는 파룬궁 수련에 더욱 관심을 갖게 되어 1997년에 중국으로 건너가 창춘에서 개최된 파룬궁 수련 심득교류회에 참가했다. 중국에 있는 동안 그녀는 어머니가 살고 있는 아파트에 가서 어머니와 함께 생활했다.
그녀의 어머니는 크리스티나에게 엄청난 변화가 있었다는 것을 즉시 알아차렸다. 크리스티나는 “어머니께서는 제가 더 이상 성급하게 굴지도 않고 가족들에게 참을성 있게 대하는 것을 목격하셨지요. 어머니께서는 제가 더욱 관대해졌고 다른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 준다고 생각하셨습니다.”라고 회상했다. 결국 크리스티나가 어머니 벤란 여사에게 좋은 영향을 미쳐 그녀의 어머니도 1998년 초부터 수련을 시작했다.
위 벤란 여사는 오래전에 다리를 다쳐 고생을 많이 했다. 그녀는 수련을 시작한 바로 후에 다리가 나아서 걸음을 잘 걸을 수 있게 되었다. 그녀는 수련을 한 후에 훨씬 젊어 보이고 기분도 젊어진 느낌이라고 자주 말했다.
평화적인 청원, 통치적 구금 그리고 강제노동수용소
1999년 7월, 중국 전 국가주석 장쩌민이 파룬궁에 대한 박해를 시작하자마자 위 벤란 여사는 파룬궁 박해를 중지해 줄 것을 청원하기 위해 베이징에 있는 국가 신방국(역주: 한국의 민원실에 해당함)에 갔다. 그곳에 있는 동안 그녀는 파룬궁 수련생들이 구금되어 있는 것을 목격했는데 그들은 단지 파룬궁 박해를 중지해 줄 것을 평화적으로 청원하려고 했을 뿐이었다.
1999년 10월, 위 벤란 여사는 천안문 광장에서 평화적인 청원을 했다는 이유로 15일 동안 두 번이나 구금되었다. 2000년 7월, 그녀는 베이징 시당국에 편지를 써서 파룬궁 박해를 중지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녀가 편지를 보내자 몇 주 후에 공안 몇 명이 그녀의 아파트에 찾아와 대화를 하자고 요청하여 그녀가 그들을 안으로 들어오게 하자 그들은 그녀를 체포하여 연행했다. 그녀의 남편은 2000년 9월 10일이 되어서야 그녀가 구금된 창핑 노동수용소로부터 통지를 받게 되어 그녀에게 겨울에 입을 옷을 가져다주었다.
살아있는 지옥
위 벤란 여사는 노동수용소에 8개월 동안이나 감금되었다. 그녀는 구금되어 있는 동안 정신적, 육체적으로 가혹한 고문을 받았다. 그녀는 매일 강요에 의해 파룬궁을 비방하는 자료를 보고 읽어야만 했다. 나머지 시간은 강제노동을 해야만 했고 잠은 5시간 밖에 자지 못했다. 그녀의 딸 크리스티나가 중국에서 입수한 정보에 의하면 벤란 여사는 자주 끔찍한 고문을 받았는데 그녀가 받은 고문들로는 발가벗기기, 인분 또는 하수 오물 속에 오랜 시간동안 잠수시키기, 고압 전기봉으로 쇼크 가하기 등이 있었다.
크리스티나는 어머니가 풀려난 후 어머니와 전화통화를 했다. 그러나 공안들이 전화를 도청하여 그들의 통화는 통제를 당했다. 크리스티나는 “제가 느끼기에는 그들은 저의 어머니를 견딜 수 없는 사지로 몰고 있었습니다. 어머니가 받은 정신적 충격은 상상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위 벤란 여사는 남편에게 노동수용소 감방에 구금되어 있는 사람들 중 3분의 2는 파룬궁 수련생들이라고 말했다.
재판도 없이 2년 이상의 노동수용소형을 언도
위 벤란 여사는 수용소에서 풀려난 후에도 파룬궁 수련을 포기하지 않고 집에서 혼자 수련을 계속했다. 2002년 9월 추석 바로 전 어느 날, 공안 몇 명이 그녀의 아파트를 다시 찾아왔다. 그녀는 그들이 영장도 없이 왔기 때문에 그들을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그러자 그들은 강제로 아파트에 들어와 그녀의 집을 약탈하고 그녀를 연행했다. 그들은 그녀의 집을 수색하여 파룬궁 서적과 테이프를 압수했다.
그녀는 팡싼에 있는 국가 공안국 구치소로 송치되었다. 그곳에서 그녀는 단지 집에 파룬궁 관련 자료를 소지하고 있다는 이유로 재판도 받지 않고 “노동교양” 2년 6개월 형을 언도 받았다. 그 이후로 그녀의 남편은 그녀를 단 한 번 밖에는 보지 못했다.
확고한 마음으로 평화적인 청원을 하다
1999년 7월, 파룬궁 박해가 시작된 이후로 뉴욕 주재 중국영사관원으로 추정되는 몇몇 중국인들이 미국에 있는 크리스티나를 따라다니며 감시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협박 전화가 수 없이 와서 여러 번이나 전화번호를 변경해야 했다.
크리스티나는 “중국의 공안들과 노동수용소 교도관들은 자기들이 중국에서 저의 어머니와 수천 만 명의 파룬궁 수련생들에게 저지르고 있는 악행을 제가 세상에 폭로할까봐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제가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은 두려워하고 있으며 당연히 두려워해야 합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녀는 또 “저는 그들이 저의 어머니에게 저지른 모든 야만적인 행위를 세상에 폭로할 것입니다. 정의는 결국 승리합니다.”라고 결연하게 의지를 표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