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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회 전세계 중국무용대회' 한국인 수상자 차성호

眞 善 忍 2007. 7. 17. 17:33

‘제 1회 전세계 중국무무용대회’ 한국인 수상자 차성호

뛰어난 기량으로 불모지인 중국무용대회서 동상 차지

등록일: 2007년 07월 10일

 
▲ 지난 6일부터 8일까지 열린 ‘전세계 중국무용대회’에서 연기하고 있는 차성호 
ⓒ 대기원
[대기원] 지난 8일 뉴욕에서 폐막된 제1회 ‘전세계 중국무무용대회’에서 한국인 무용수로는 유일하게 차성호(車星鎬.24)가 시니어부 동상을 차지했다.

중국어 위성방송국 ‘NTDTV’ 주최로 올해 처음 개최된 이 대회는 순수하고 아름다운 중국 정통무용 예술을 널리 알리고 중국무용의 신기원을 연다는 취지로 6일부터 8일까지 뉴욕대학 내 스커볼 공연아트센터(Skirball Center for the Performing Arts)에서 열렸다. 예선과 본선, 결선을 거쳐 각 부문에서 금상을 차지한 수상자들에게는 상금 1만 달러가 주어졌다.

여자 시니어부 금상은 비천 예술학원의 런펑우(任鳳舞, Michelle Ren)가 남자 시니어부 금상은 1991년도 중국 타오리 컵(桃李杯)무용대회 금상 수상자인 천융자(陳永佳)가 수상했다.

여자 주니어부 금상은 저우위센(周雨璇)이, 남자 주니어부 금상은 Jason Shi가 각각 차지했다.
조선족 무용수인 김정애와 함께 한국대표로 참가한 차성호는 이번 국제대회 수상으로 발레 전공자로서 중국무용대회에 입상한 ‘특별한’ 경력을 갖게 됐다. 4년 전 무용을 포기하려고도 했던 그가 이번 중국무용대회에서 동상을 수상하기까지 남다른 그의 이력을 살펴본다.

천부적 기교로 무용에 영혼 담아

2001년 대전 예술고를 졸업한 차성호는 세종대 재학 중 미국 유학길에 올라 전액장학금을 받으며 미국 포인트파크 대학(Point Park University)를 졸업한 재원이다.

2000년 한국 발레협회 경연대회 은상, 2001년 금상을 수상하기도 한 그는 이미 국내에서 손꼽히는 발레 무용수로 통한다. 이번 중국무용대회에서도 예선부터 뛰어난 연기로 취재진의 스포트라이트를 한 몸에 받았다.

차성호는 어릴 적 공군에 근무하던 아버지를 따라 한국과 미국을 자주 오갔다. 불안정한 생활 속에서 그의 어린 심령을 건강하게 키워준 것은 아버지가 부르는 오페라와 어머니의 바이올린이었다. 한살 터울인 형은 일찍부터 피아노와 바이올린 연주에 재능을 나타냈다.

그 역시 어릴 때부터 피아노를 배웠지만 아버지는 그에게 남다른 재능이 있음을 알고 일찍부터 발레를 배울 것을 권했다. 하지만 어린 그에게는 무용보다는 태권도가 더 매력적으로 느껴져 한동안 태권도에 빠지기도 했다. 그는 이 때 단단하고 강인한 신체를 연마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15살이 되던 해, 그는 운명적으로 다시 무용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대전 예술고에 진학하면서 발레학과를 선택한 것. 이 때부터 그는 프로무용가를 꿈꾸기 시작한다.

그는 지칠 줄 모르는 열정으로 계속해서 난이도가 높은 동작에 도전했다. 자신의 한계를 초월하는 쾌감을 느끼면서 그는 고전 발레가 규정한 완벽한 표준에 접근해 가고 있었다. 그의 뛰어난 신체조건은 비약적인 발전의 기초가 되었고 주위 동료들의 여러 장점은 곧 그가 배우려는 목표가 되었다.

그는 당시 자신이 무용에 매료된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무용은 마치 바라볼 수는 있으나 도달할 수 없는 산봉우리와 같았다, 나는 끊임없이 도전하고 싶었다”


 
▲ 차성호의 발레 연습장면 
ⓒ 대기원, 차성호 제공
 
▲ 차성호의 발레연습 장면 
ⓒ 대기원, 차성호 제공

한 때 무용 포기 하기도

2001년 대전예술고 재학 중이던 차성호는 두 차례 무용대회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했다. 공주대학교 콩쿠르와 한국 발레협회 경연대회에서 각각 대상과 금상을 차지한 것. 2002년 유명 무용대학인 세종대 재학 중 미국으로 건너간 그는 ‘애너하임 발레(Anaheim Ballet)’ 등과 계약을 체결하고 ‘호두까기 인형’, ‘파키타’ 등 공연에서 주역으로 활동했다. 하지만 그는 점차 자신의 무용인생이 막바지에 이르렀다는 막연한 의구심이 들기 시작했다.

그의 무용 기술은 매우 뛰어났다. 하지만 170cm밖에 안되는 작은 키 때문에 파트너를 정하기가 어려웠으며 이는 그가 일부 무용단과 계약을 체결하는데 영향을 미쳤다. 인맥을 중시하는 국내 무용계에서 그는 여러 번 자신보다 기량이 뒤처지는 무용수들이 자신이 꿈꾸던 위치를 차지하는 것을 보았다. 미국 무용단에서는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그를 고용하길 꺼려했다.

당시 그의 가장 큰 꿈은 고전 발레를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고전 발레는 프로그램이 적고 시장이 협소하기 때문에 많은 무용단이 수입을 위해 여러 가지 현대무용을 창작해 관람객들을 만족시키고 있는 형편이었다. 이것들은 모두 그가 원하는 진정한 예술이 아니었다.

2003년 어느 날, 그는 이제 그만 무용을 포기하기로 결심했다. 무용과 관련된 모든 것들이 보기조차 싫어졌다. 한두 달 후 그는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우울증에 빠져들었음을 발견했다. 무용 없는 생활은 오아시스 없는 사막처럼 그를 질식시키고 있었다. 하지만 곧 그의 무용인생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다 줄 사건이 운명처럼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 차성호 
ⓒ 대기원, 차성호 제공

 
▲ 차성호의 연습 장면 
ⓒ 대기원, 차성호 제공



인생의 전환점에 서다

어느 날 차성호는 미국 화교들이 주축이 된 무용단, ‘신운(神韻)예술단’과 그들의 공연 ‘스펙태큘러’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됐다. 이 때까지만 해도 그는 중국 고전무용이 한국 전통무용과 비슷하지만 발레와는 완전히 다른 체계라고 생각해서 전혀 관심을 갖지 않았다. 하지만 지난 해 말, 우연히 중국무용에 대해 비교적 많은 것을 듣게 되면서부터 그는 중국무용 배우들이 탄탄한 발레의 기본기를 갖추고 있음을 발견했다. 어린 시절 태권도를 연마해 온 차성호를 더욱 놀라게 한 것은 중국무용에는 일부 무술동작과 탄즈궁(?子功-중국무술의 일종)도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올해 2월 뉴욕 록펠러 센터 내 라디오시티 뮤직홀에서 열린 ‘스펙태큘러’ 공연은 그에게 여태까지 느껴보지 못한 진한 감동을 안겨 주었다. 그는 당시의 느낌을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중국무용이 그처럼 아름답다는 것을 그때 처음 느꼈습니다. 아주 간단한 손놀림과 발동작에도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무엇이 담겨 있었습니다. 그것이 중국무용에서 말하는 ‘신운(神韻)’이라는 걸 그 이후에야 알았습니다. 무용은 음악과 배경스크린의 조화 속에서 끝없는 매력을 뿜어내고 있었습니다. 저는 처음으로 중국무용이 수 천 년 역사를 갖고 있는 풍부한 문화의 보고라는 걸 느꼈습니다. 중국무용만이 여러 인물들의 이야기와 심리를 진실하게 드러내 보일 수 있고 무용가들에게 무한한 표현공간을 제공할 수 있다는 점을 깨달은 것입니다”

차성호는 끝내 자신이 무엇 때문에 무용인생을 선택했는지 깨달았다. 그는 자신이 지금까지 흘린 땀이 무엇을 위해서였는지를 생각했다. 중국무용이 바로 그 답안이었고 그가 오랫동안 찾고 있던 숙명적인 귀착점이라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 중국무용대회에서 열연하고 있는 차성호 
ⓒ 대기원
 
▲ 중국무용대회에서 열연하고 있는 차성호 
ⓒ 대기원
 
▲ 중국무용대회에서 열연하고 있는 차성호 
ⓒ 대기원
 
▲ 중국무용대회에서 열연하고 있는 차성호 
ⓒ 대기원


그는 이렇게 무용인생의 큰 전환점을 돌았다. 그는 곧 뉴욕에서 유명 중국무용강사을 찾아 중국무용을 배우기 시작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탄탄한 기초와 강한 결심으로 발전은 빨랐다. 그를 지켜보던 많은 친구들이 ‘전세계 중국무용대회’에 참가할 것을 권했다.

시합 전, 그는 중국무용의 신운(神韻)을 완벽하게 표현해내기 위해 일분일초를 아껴 노력했다. 예선과 본선 경연에서부터 일찌감치 취재진의 주목을 받던 그는 결선에서 아쉽게도 동상에 그치고 말았다. 준비 기간이 좀 더 충분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 대목이다.


쉬주스(徐竹思), 허민 기자




동영상: 무용가 차성호의 연습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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