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원시보(大起元時報)

나는 평생 DJ 김광한

眞 善 忍 2007. 3. 16. 14:22

나는 평생 DJ 김광한

DJ 김광한 씨의 즐거운 일상

등록일: 2007년 03월 02일

꿈이 있는 사회는 아름답다. 온몸을 던져 이뤄볼 만한 미래가 있다면 현재의 어려움은 ‘이쯤이야’하며 견뎌낼 수 있다. 젊은 시절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안정된 직업을 거부하고 오히려 고난을 선택했던 ‘DJ 김광한 씨(60)’를 만났다.
 


“안녕하십니까? 김광한의 팝스 다이얼입니다.” 팝송에 열정을 담아 FM라디오로 한 시대를 풍미한 부드러운 목소리의 주인공 김광한 씨는 자신을 ‘영원한 DJ’로 소개한다. 지금은 라디오 방송을 잠시 쉬면서 인터넷 방송과 TV 음악 프로그램 제작을 준비하고 있다.

그는 기회가 닿는 대로 우리나라 음악발전에 일조할 만반의 준비가 되어있는 ‘현역 DJ’다. 우리 사회에 만연하게 퍼져있는 퇴직이라는 두려움을 전혀 느낄 수 없는 당당함과 노력하는 자세가 바로 젊음을 유지하는 김광한 씨의 비결인 듯했다.


방송사상 최연소 팝송전문DJ

1965년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FM전파를 내보낸 서울 FM방송은 이듬해인 66년 대학을 갓 졸업한 김광한을 라디오 DJ로 채용한다. 김광한 씨는 대학시절에 이미 팝송에 대한 지식과 많은 음반 소유로 이름나 있었다. “그 당시 DJ는 최고의 인기인이었다. DJ가 전화로 희망곡을 받으면 서울 시내 전화가 금방 불통이 될 정도였다. 팝송을 안다는 것과 지식인이 동급으로 인정받던 시절, 팝송 DJ는 정말 매력적인 직업이었다.”고 김광한 씨는 회고했다.

그는 방송사상 ‘최연소 팝송전문DJ’가 되어 ‘FM히트 퍼레이드’를 진행했다. 그때의 심정을 김광한 씨는 “신천지를 개척하는 기분이었다. 방송국에 취직되어 내 이름과 목소리가 나간다는 것만으로도 같은 분야를 준비하는 동기와 후배들은 고무됐다.”고 말했다.

김광한 씨는 기백대 정도의 FM수신기가 보급된 어려운 상황에서 수신기 보급을 겸하면서 열정적으로 방송진행을 했다. 하지만 방송사의 운영난으로 인해 100여 회를 끝으로 그의 첫 DJ생활은 마감된다.

 
▲ 젊은 시절에 즐겨 입던 청바지와 마이클잭슨 잠바차림의 멋진 김광한 씨 
그 어떤 일도 나를 감동시키지 못했다

군대를 제대하고 9년 동안 김광한 씨는 일부러 정규직업을 찾지 않았다. 오로지 음악을 하기 위해 우유배달, 신문배달, 보험판매 등 16종의 다양한 직업을 거쳤다. 그때의 심경을 김광한 씨는 “그 어떤 일도 나를 감동시키지 못했다. 나는 DJ만 하고 싶었다. 내가 거친 다른 직업은 DJ가 되기 위한 준비 단계였다. 돈을 벌면 음반을 사고 책을 사고 비디오자료를 모았다.”고 표현했다. 학교를 졸업하고 번듯한 직장은 쳐다보지도 않고 내면의 꿈을 향해 한 발자국씩 다가간 그의 젊은 시절은 빠르게 결과를 내려하는 요즘 시대에 무언의 메시지를 던진다.

여러 가지 일을 전전하다가, 김광한 씨는 70년대에 우리 사회에서 유행했던 음악다방 DJ로 정착한다. 무엇보다 자신이 원하는 일인 팝송을 소개할 수 있었고 방송에 대한 대리만족도 됐다. 7~8년 동안 음악다방 DJ로 일한 이 시간을 김광한 씨는 “무명가수가 데뷔하기 전에 허름한 무대에서 노래하듯이, 나에게도 음악다방 DJ로 일한 시간이 바로 DJ 훈련 기간이었다.

삶에 대해, 운명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그런 아픈 시절이 있었기 때문에 경쟁이 치열한 라디오에서 DJ로 장수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고통을 겪은 사람은 인생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어, 그가 설명하는 팝송들은 참된 삶을 찾던 80년대 청취자들에게 더욱 호소력이 있었던 것 같다.

 
▲ 가수 백영규 씨와 함께 
4년 연속 인기DJ 1위에 오르다

1964년 동아 방송에서 ‘탑튠쇼’의 담당 PD였던 최동욱 씨가 DJ를 하면서 우리나라 방송에서 최초로 디스크자키(DJ) 방식이 시작됐다. 이후 다른 방송에서도 DJ방식을 채택하면서 60년대 후반은 팝의 홍수를 이루고 70년대는 FM라디오의 전성기가 된다.

최초로 FM방송을 했지만 방송에서 멀어진 채로 DJ의 꿈을 다시 현실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던 김광한 씨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그는 79년 당시 방송 DJ계의 독보적인 존재였던 박원웅 씨의 ‘박원웅과함께’에 게스트로 초청 받았다. 이를 계기로 80년 4월 1일 TBC FM에서 김광한 씨는‘탑 튠 쇼 (TOP TUNE SHOW)’로 마이크를 잡는다.

그러나 그해 12월, 정권의 언론 통폐합으로 TBC는 KBS로 합병되어 김광한 씨는 다시 일자리를 잃지만 행운의 여신은 탄탄한 실력에 발목이 잡혀 그를 떠나지 못한다. 마침내 82년 2월 1일 그 유명한 KBS FM ‘김광한의 팝스 다이얼’이 오후 2시에 방송을 시작해 ‘인기 DJ 김광한’의 시대를 연 것이다.

김광한의 팝스 다이얼은 김기덕의 두시의 데이트와 함께 80년대 팝음악의 활황기를 이끄는 견인차 역할을 했다. 2003년까지 ‘김광한의 골든 팝스’를 진행하며 20여 년을 청취자와 호흡했던 그는 “80년대 젊은이들은 진지했으나 암울한 시대상으로 인해 팝송에서 위안을 찾는 경향이 있었다. 90년대는 민주화된 정부로 인해 청취자들이 더 밝은 분위기의 팝송을 찾았다.”고 청취 경향을 분석했다.

혼자서 곡을 선별하고 원고도 작성하는 전문 DJ로서 그는 좋은 팝송을 들려주기 위해 끊임없이 팝음악을 공부하고 외국의 최신 경향을 연구했다. 그 결과 82년 국내 최초의 ‘비디오쟈키’로서 뮤직 비디오를 소개했다. 요즘의 개그 프로그램과 같은 ‘유머1번지’의 마지막 코너에 ‘쇼!비디오쟈키’로 들어가 많은 인기를 끌었다. 지금은 가요계에 만연한 뮤직 비디오 개념을 처음으로 도입한 김광한 씨는 자신의 일에 대한 끊임없는 노력으로 일찌감치 ‘블루오션’을 개척했다.


‘DJ’는 음악전도사

40년을 DJ로 살아온 김광한 씨는 DJ의 역할을 “DJ는 음악으로 세상을 감동시키고 세상 사람들에게 공감을 불러 일으켜 그들이 자기의식을 계발하는데 촉진제 역할을 하는 사람이다. 음악으로 어려운 상황에 처한 사람들을 도와주고 안내하는 음악전도사다.”라고 분명하게 말한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DJ프로그램은 음악을 많이 들려주고 메시지가 있는 음악을 찾아서 청취자들이 미래지향적인 사고력을 기를 수 있게끔 음악과 관련된 대화를 하는 것이라고 그는 덧붙였다.

젊은 시절의 멋스러움이 세월에 묻혀 한때, 넉넉한 체구를 자랑했던 김광한 씨는 요즘 다시 옛 모습을 되찾고 있다. 대전에 있는 지인의 처방으로 ‘한방다이어트’를 하는 중이다. 개성이 강하고 곧은 성격인 그는 요즘,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심신수련법인 ‘파룬궁’수련을 하면서 더욱 바른 생활을 하게 되어 좋다고 한다. “요새는 음식을 봐도 먹고 싶은 생각이 덜 나는데, 수련 덕분인 것 같다.”며 웃는다. 먹는 것에 대한 집착은 생존의 본능인데 그 집착을 자연스럽게 없애는 수련이라면 참으로 대단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으로 김광한 씨는 우리나라가 대화를 통해 국민들이 시위할 필요 없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한다. “대중매체는 나날이 발달하는데 사람들 사이의 소통은 오히려 두절되고 있다. 대화가 필요한데 그중에서도 아이들과 대화가 더욱 절실하다. 아이들과 이야기를 많이 나누는 것은 정서적으로 안정될 뿐만 아니라 아이들 자신의 미래 경쟁력으로 직결된다. 말을 잘하는 사람들이 이 세상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훨씬 많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는 미디어 시대를 살면서도 말을 너무 못한다.”고 김광한 씨는 말을 맺었다.

/정희순 기자
<사진제공 : 김광한 씨>